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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에 시민이 참여하는 새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출처 동아사이언스 바로가기 등록일 2017.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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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사진 1
송위진
선임연구위원
혁신정책연구본부


“과학기술에 시민이 참여하는 새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세계 최고의 과학’보다 ‘세계를 위한 최고의 과학’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모르튼 스테가드(Morten Østergaard) 덴마크 고등교육부 장관은 2012년 4월 23일 덴마크 오덴세에서 열린 ‘대화의 과학’ 컨퍼런스 개막식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이제는 첨단과학기술을 중심에 둔 ‘세계 최고의 과학(the best science in the world)’ 경쟁보다 세계 시민에게 돌아갈 혜택을 중심에 둔 ‘세계를 위한 최고의 과학(the best science for the world)’을 고민해야 할 때라는 뜻이었다. 과학기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명연설로 지금까지 널리 회자되고 있다.

 

●한국에도 불기 시작한 ‘사회를 위한 과학’

 

3월 15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국민생활연구 포럼’이 열렸다. 안전·복지·환경과 관련된 국민생활 문제를 해결하고 생활세계에 뿌리내리는 과학기술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공교롭게도 지난 10년간 경제는 성장했지만 삶의 질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는 ‘국민 삶의 질 종합지수’ 조사결과가 같은 날 발표됐다.

 

포럼은 성공적이었다. 많은 청중이 몰려 자료집이 모자랐고 토론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겼다. 대선을 앞두고 수많은 의제들이 분출하는 상황에서도 일반인들과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필자는 여기에 발표자로 참여했다.

 

복고적인 느낌을 주는 ‘국민생활연구’라는 용어를 내세웠지만 포럼의 내용은 미래지향적이고 혁신적이었다. 우선 과학기술계를 위한 과학기술, 산업계를 위한 과학기술을 넘어 시민사회를 위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천명했다. 과학기술활동에 돈과 사람을 공급하고 그것의 궁극적인 사용자가 되는 시민들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본 것이다.

 

또 새로운 프레임으로 과학기술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과학기술활동의 객체로 있던 시민들을 주체로 불러내고 있다. 국민생활연구를 통해 해결해야할 문제를 발굴하고, 연구방향을 정하며, 개발된 제품과 서비스를 실증하는 과정에 시민사회의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장치로서 ‘리빙랩(Living Lab)’에 주목했다.

 

리빙랩은 특정 지역이나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들이 참여해서 제품·서비스를 공동으로 진화시키는 혁신모델이다. 장애인 학교나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역 의료 사회적협동조합이 리빙랩에 참여해서 연구자와 함께 자신들의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구체화해나가게 된다.

 

올 1월에 미래부에 새롭게 만들어진 ‘국민생활연구팀’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토론자로 참여한 팀장이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팀의 설치는 부처 차원에서 향후 그 의제를 중요시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에 사무관 혼자 담당하던 업무를 이제는 팀을 통해 4-5명이 수행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그러나 새로운 관점, 추진체제, 조직을 가지고 사회에 책임지는 과학기술을 구현하는 국민생활연구 사업이 넘어야할 산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우선 기존 시스템의 관성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 대학과 연구기관의 과학기술활동, 언론의 과학기술 인식은 기-승-전-경제였다. 이것은 정부의 과학기술투자와 정책결정의 주요 원리이며 여러 제도와 산학연 주체들의 행동이 이 패러다임에 입각하고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논문 쓰고 특허 내기도 바쁜데 무슨 사회문제 해결이냐고 이야기한다. 기술료가 적은 연구를 왜 하냐고 되묻기도 한다. 공무원들은 경제가 발전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다. 언론은 4차 산업혁명 대응과 노벨상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기술한다. 이들을 설득하면서 사회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는 국민생활연구를 활성화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국민생활연구를 함께하는 생태계 형성도 쉽지 않아 보인다. 대학이나 출연연구기관에서 사회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는 많지 않다. 연구비 규모가 크지 않고 논문·특허·기술료를 중시하는 평가제도도 사회문제 해결형 연구에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는 소셜벤처, 사회적 경제조직, 비영리조직들은 아직 활성화되지 못했다. 또 과학기술계와 연계도 약하고 협업을 해본 경험이 없다.

 

●시민이 참여하는 새로운 과학기술 거버넌스

 

 이런 난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선 과학기술혁신정책 총론 수준에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문제 해결을 과학기술 지식 창출, 산업발전과 같은 비중을 갖는 의제로 만들어야 한다. 핵심 의제로 다루면서 국가가 자원을 배분하겠다는 의지가 표시되어야 민·산·학·연(民·産·學·硏) 혁신주체들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기초·원천연구’, ‘산업혁신연구’에 상응하는 ‘사회적 도전과제 연구’와 같은 새로운 범주를 도입하여 일정 예산을 배분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유럽연합(EU)은 2010년대 초에 호라이즌(Horizon) 2020 전략을 발표하면서 이런 작업을 했다. 유럽에서 ‘사회에 책임지는 연구와 혁신(RRI)’이 혁신모델로 확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음으로 시민사회의 실질적 참여가 이루어지는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거버넌스는 정부가 주도하는 통치(거번먼트)를 넘어 정부·이해당사자·시민사회가 참여하는 협치를 말한다. 과학기술계에서는 이상하게도 그것을 행정체제로 논의해왔다. 과학기술을 전문가의 활동으로만 이해해서 이런 현상이 생겼다. 협치의 의미를 살려 부처들 간의 협의체만이 아니라 과학기술계·사회·정부가 참여하는 ‘과·사·정 협의체’를 정책결정 시스템에 도입하는 것도 필요하다. 노·사·정위원회처럼 말이다. 시민참여는 민주주의를 고양하고, 전문지식과 현장지식을 융합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식이 될 수 있다. 이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혁신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또 국민생활연구와 같은 과학기술계의 활동과 소셜벤처, 사회적 경제조직, 지자체의 사회혁신 활동이 융합될 수 있는 ‘과학기술+사회혁신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 출연연구기관, 대학, 지역혁신센터 등에서 이런 활동을 잘 할 수 있는 조직을 선별해서 과학기술과 사회혁신을 융합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새로운 네트워크와 사업을 만들어내는 프로그램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우리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과학기술을 생활세계에서 구현하는 국민생활연구는 시민들이 던진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과학기술계의 대답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