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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와 징조를 살핀 조선 최고의 군주 세종
출처 중앙일보 바로가기 등록일 2018.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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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사진 1
박성원
연구위원
글로벌혁신전략연구본부

 
박성원의 예측사회 ①

장래와 징조를 살핀 조선 최고의 군주 세종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늘 예측한다. 물건을 움직일 때, 집을 나서 목적지로 갈 때, 누구를 설득할 때, 내일의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늘 예측한다.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그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까, 누구에게 득이 되고 누구에게 해가 될까. 매 순간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미래를 헤아리면서 산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근육도 단련하지 않으면 물러지듯 상상력도 단련하지 않으면 약화하고 퇴화한다. 나의 미래 예측 역량을 높이는 방법은 없을까. 박성원의 예측사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 다양한 국내외 사례와 경험을 소개한다.

 

올해는 세종대왕이 즉위한 지 600주년이다. 세종은 1418년 조선의 4대 왕위에 올라 1450년 숨을 거두기까지 32년을 통치했다. 이 기간은 조선 최고의 전성기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과학기술·문화예술·국방·외교 등에서 탁월한 성과를 올렸다.

 

특히 과학기술의 경우 훈민정음 창제는 물론 세종실록지리지, 농사직설, 천문대 대간의대, 자격루(자동 물시계), 측우기, 철제 화포, 의방유취(의학대백과사전) 등 세계적인 성취를 기록했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은 그가 펴낸 ‘세종이라면’에서 “세종 재위 기간에 거둔 과학기술의 성과는 21건으로 같은 기간 중국(4건), 유럽과 아랍 등(19건)의 것보다 많았다”며 “당시 조선은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 선진국”이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세종 시대의 수많은 업적에 대해 많은 분석이 있지만, 필자는 미래 연구자의 관점에서 설명해보려고 한다.

 

세종, 데이터 분석으로 미래 예측

조선왕조실록에서 미래를 뜻하는 ‘장래(將來)’라는 단어가 가장 빈번하게 쓰인 실록은 세종실록이다. 32년 동안 장래가 184번(국사편찬위원회 번역 기준) 나오는데, 연평균 5.8회에 달한다. 세종실록 다음으로 장래가 많이 언급된 중종실록의 경우 160회가 언급돼 연평균 4.1회였다. 문예 부흥기로 알려진 영조와 정조 시대에 장래는 각각 63회(연평균 1.2회), 72회(연평균 3회)가 언급되는 데 그쳤다.

 

장래라는 단어가 기록된 세종실록을 보면 ‘장래를 경계하여’ ‘장래를 대비해야’ ‘장래를 헤아려야’ ‘장래를 돌보아야’ 등의 표현이 발견된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장래를 잘 살펴 농사짓는 백성이 시기를 잃어버려 탄식하지 않도록 살펴보라”(세종 6년 3월 28일)고 당부했고, 기후가 고르지 못한 때에는 한재(가뭄으로 생기는 재앙)를 예상해 “백성들에게 환자(흉년에 곡식을 대여해주고 추수 때 이를 환수한 제도)를 나눠줘 오로지 백성을 먹여 살리는 데 힘쓰도록 하라”(세종 8년 2월 22일)고 말했다.

 

조선의 다른 왕들과 달리 세종은 장래를 과학적으로 예측하고 대비하려는 태도를 견지했다. 대표적인 예가 세종 23~24년 측우기의 개발과 확산이다. 다른 왕들은 가뭄의 때에 기우제를 지내는 것에 머물렀지만 세종은 측우기를 만들어 연 강수량을 측정했다. 과거 강수량을 잴 때 땅을 파서 빗물이 들어간 깊이를 재는 것이 관례였지만, 세종은 이런 관례에 많은 허점이 있음을 파악하고 쇠로 주조한 측우기를 만들어 과학적으로 강수량을 쟀다.

 

사실 미래(未來)라는 단어는 근대 이후 빈번하게 쓰인 단어다. 미래를 불확실한 시공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과학기술이 사회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면서부터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 미래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통틀어 66건(국역)만 나온다. 조선시대에 미래는 장래(장차 다가올 미래)라는 단어가 주로 쓰였던 것이다.

 

세종 24년 5월 8일 기록을 보면 호조가 우량을 측정하는 일을 세종에게 보고하면서 “비가 온 양을 기록해 두어 후일에 참고하겠다”고 밝힌 대목이 나온다. 세종은 측우기로 비의 양을 측정해 데이터로 남기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사용했을 뿐 아니라 강수량을 기준으로 지역별 작황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조세를 매기는 데에도 활용했다.

 

변화의 조짐 '징조'…잠재적 요인

세종은 징조(徵兆)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다른 왕들과 사뭇 달랐다. 징조는 미래학계에서 사용하는 이머징 이슈(emerging issue)로 풀이할 수 있는데, 아직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변화의 조짐이지만 장차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잠재적 요인이다. 징조라는 단어는 다른 실록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중종실록에는 126번, 성종실록에는 86번 언급됐고, 세종실록에서는 이보다 적은 65번이 언급됐다.

 

그러나 세종은 다른 왕들과 달리 징조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만의 철학을 드러낸다. 일례로 세종 1년 6월 2일 기록된 것을 보자. 세종은 가뭄 때문에 신하들에게 구언하는 교서를 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금도 비가 내릴 징조가 없으니, 아침저녁으로 삼가고 두려워해서 몸 둘 바를 알지 못하는지라, 바르고 충성된 말을 들어서 재변이 풀리기를 원하노니, 대소 신료와 한량(무관이 될 수 있는 가문의 출신으로 아직 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자), 기로(60세 이상의 노인)는 각각 마음에 생각하는 바를 다 말하여, 이때 정사의 잘못된 것과 생민의 질고를 숨김없이 다 진술하여, 내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애휼하는 뜻에 부합하게 하라. 그 말이 비록 사리에 꼭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죄주지는 않으리라.

 

세종이 꿈꾼 ‘학습사회’…지식의 한계 극복

징조를 탐색하는 이유는 앞으로 다가올 사건을 예측해 대비하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징조를 통해 조직이 지금까지 간과하거나 무시했던 정보가 무엇이었는지 논의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정보가 간과된 구조적 이유를 밝혀야 한다.

 

개인이나 조직은 외부의 변화를 해석하는 나름의 인식모형(mental model)이 있다. 징조를 탐색하는 활동은 이런 인식모형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있다. 세종은 부정적인 징조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모르는 것, 잘못한 것을 숨김없이 말해달라고 요청한다.

 

‘창조적 학습사회’라는 책을 펴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는 더 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생산성 향상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선진국이란 학습사회가 잘 조성된 곳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세종이 꿈꾸는 사회는 학습사회로 볼 수 있으며 자신이 솔선수범해 당대 지식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앞서 언급한 기록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보자. 놀라운 것이 세종은 징조를 통해 자신이 간과했던 정보에 대해 신하들이 말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그 정보가 딱히 사리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죄를 묻지는 않겠다는 약속까지 한다는 점이다.

 

사실 새로운 정보는 이전의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새롭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당장은 타당한 이유를 댈 수 없더라도 공론으로 끌어들여 논의하는 것이 지혜롭다. 이런 점에서 세종은 끊임없이 새로움을 탐색하고 새로운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 시대에 과학기술은 물론 문화 예술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장래와 징조를 살피고 대비하려는 세종의 미래지향적 태도가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뿐 아니라 많은 신하도 장래를 걱정하고 대비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다른 실록과 달리 세종실록에 장래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언급돼 있을 것이다. 세종은 예측하는 사회를 구축해 나라를 발전시킨 조선 최초의 군주로 봐도 과언은 아니다.